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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훈]인애

仁愛 : 어진 마음으로 사랑하는 일. / 애정을 참고 견딤.

*

네 눈물이 내게 닿으면 난 무너지는 우주가 된다.
그러니 네가 울지 않기를, 내가 무너지지 않기를, 하늘에 대고 간곡히 빌어본다.

-조병화, 꿈 中 -



인애(Hesed)

w.아카



이창섭.정일훈.육성재. 이 이름들이 떨어져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날들이 있었다.  한 명의 이름이 불리면 자연스레 다른 이름들도 따라오던, 실과 바늘 같던 그런 나날들. 정일훈이 사라지면 육성재를 불렀고, 육성재가 안 보이면 이창섭을 불렀다. 얼마 있지 않으면 그곳에 찾던 사람이 나타났으니까.
그때의 우리는 세상에 우리밖에 존재하지 않는 듯 붙어 다녔으며 우리가 함께한다면 두려울 것도 없다고 믿었었다.

18살, 다신 돌아가지 못할 찬란했던 우리의 시간,  가슴 아픈 우리의 청춘.
 
아름답던 우리의 추억은 그 아름다움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육성재, 그가 우리의 곁을 떠났다. 무슨 마음으로 스스로의 생을 달리한 건지 우리로서는 그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전혀 그런 낌새를 눈치채지도 못했지만 이미 그는 가버린 후였고, 우리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그를 몰아붙이는 동안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져 그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 밖엔 할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난 뒤 경찰은 그의 사인이 학업에 의한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마 성재가 죽음을 결심한 이유를 끝끝내 알아내지 못한 채 자신들의 심증으로 내린 결론이었을 게 분명했다. 그가 공부와는 어울리지 않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 믿기 어려운 결론에도 우리는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우리조차도 명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는데 경찰이 조사한다고  알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십 년이 훌쩍 지난 예전의 일이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가끔씩 그에 대한 생각을 하고는 한다.
 
성재야, 네가 우리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그렇게 급하게 떠났던 이유가 뭘까.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찾지 못했어. 너를 다 안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우리가, 내가 사실은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은 아직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많이 보고 싶다, 성재야.
 
 그 어정쩡한 경찰의 결론이 나온 뒤 우리는 함께하지 않았다. 너와 같이 있으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그의 그림자를 나는 견딜 수가 없었어. 육성재가 떠오르는 그 순간들을. 어렸던 나는 그 커다란 허무함과 슬픔을 견디지 못했고 그 길로 그 동네를 도망치듯 벗어났다. 아마 이창섭도 그곳에 오래 있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떠났을거다. 그 뒤로 우리는 만날 수도 없었고, 만나지도 않았다.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고 생각했었지만 노력하니 그 담은 조금씩 무너져내렸다. 1년간의 재수를 마치고 4년제 공립 대학에 들어갔으나 행복하진 않았던 거 같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니 지금도 여전히 나는 그때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게 아닐까. 웃는 법, 우는 법, 감정의 사용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 덕분인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새로운 친구가 생기는 일은 없었다. 다시 창섭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쭉 혼자였고, 그렇게 내가 만든 웅덩이 안에서 고립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중소기업에 들어가 하루하루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던 죽어가던 내게 그가 찾아왔다, 다신 볼 수 없을 거라 믿었던 나의 작은 우주가 찾아왔고 멈췄던 우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라면 웃기지 말라고 소리쳤을 게 분명했다. 이창섭은 작가가 되어 있었으며 그의 필명은 나도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만가. 아마도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노래나 가사라는 뜻을 담고 있는 단어일 터였다. 그의 필명대로 그의 소설은 슬프고, 피폐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내용으로 유명했다. 그럼에도 소설에 담긴 그의 처절한 몸부림 같은 글들은 한 글자 한 글자가 독자의 심금을 울렸고 단기간에 베스트셀러를 차지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다시 마주한 그는 그의 소설 속의 인물처럼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도 나처럼 감정을 잃어버린 걸까. 다시 만났을 때 여전히 우리는 같았다. 행복하지 못하는 게.
 
" 왜.. 왜 이제야 찾아왔어?"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 먼저 떠난 것도 나고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도 나다. 지금이라도 나를 찾았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가는 말들은 머릿속과는 상반되는 단어들이다.

"나는.. 나는 그동안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어, 근데 너를 찾아가지도 못했지. 널 보면,, 우리가, 그때의 추억이, 육성재가 생각날 테니 깐. 그렇지만. 그래도 보고 싶었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는 채 그를 향해 정리되지 않은 단어들을 내뱉고 있다.

" 너.. 그게 할 말이야? 내가.. 내가 얼마나! 육성재가 그렇게 된 뒤로 너까지 훌쩍 사라져 버리고. 내가 어떤 기분이었을 거 같아. 컴컴한 어둠 속, 우주 한가운데서 추락하는 기분이라고 한다면 설명이 될까? 아니, 한참은 못 미쳐! 그때 내게 남은 건 너뿐이었는데."

그가 소리친다.

" 나도 너뿐이었어! 물론 도망친 건 병신 같았지만..! 그래도 어떡해, 널 보면 성재가 떠오르는걸. 아니, 아니지. 정확히는 빛나던 우리 셋의, 잊지 못할 우리의 추억들을."

언제부터 흘러내렸을지 모를 눈물에 의해 두 뺨은 어느새 눈물로 범벅되어 있었다. 나도 알아, 내가 한심하고 멍청하다는 거. 그러니까 이런 나약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모든 책임을 너한테 미루는 것뿐이야. 미안해, 날 이해하지 않아도 돼.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아. 그래도 그렇다고 버리지는 말아 줘.

" 나도 생각나! 그러니까 더 네가 옆에 있길 바랐던 거고! ..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갔는데 왜 아직도 이러고 살아. 너도, 나도."

평생 쏟을 눈물은 다 쏟은 것 같다. 누가 떼어놓은 것도 아니면서 우리는 10년간이 넘는 시간을 떨어져 있었다. 순전히 내 나약함으로 인해서.
 
이창섭과 다시 만난 뒤로 일주일이 흘렀다. 우리는 매일 서로의 얼굴을 봐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 그 오랜 시간 연락 한번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단 하루도 빼먹을 수가 없다. 그의 존재를 확인하고 시작하는 하루는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잊고 있던 감정들이 살아나는 나날들이 벌어져간다.
 
 

 
" 하하, 뭐래. 미친 거 아니야? 그래서?"
" 그러니까 그 자식이..."

세 달이 지나갔다. 그 사이에 우리는 길었던 공백의 시간을 메꿀 수는 없었지만 필사적으로 서로가 없던 서로의 시간을 궁금해했다. 요즈음 우리의 모습은 마치 예전의 내가 가끔 상상하곤 했던 아무 일도 겪지 않고 그대로 자란 우리의 모습과 닮아가고 있었다. 창섭이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과거로 이끌려간다. 그러나 더 이상 성재가 떠올라 괴롭지는 않았다. 떠오르는 과거의 잔상들은 행복했던 추억에 머무르고 성재와의 기억은 더 이상 떠올리기조차 힘든 아픈 기억만은 아니었다. 그는 함께 있으면 재미있던 언제나 보고 싶은, 그리운 18살의 친구였다.

 
 
"일훈아, 우린 우정일까."
"응?"
"우정일까, 사랑일까."

그러게 우린 도대체 뭘까, 뭔데 우리 사이는. 어떤 친구가 이렇게 애틋해. 이렇게 위태로워.

 
이제까지 누리지 못했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됐다고 너무 좋아해서일까. 만약 정말로 신이 있다면 그는 나를 미워하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한테 어떻게 이렇게 잔인해.

살면서 이런 병명을 들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난생처음 들어보는 이름을 가진 희귀병이 네게 생겼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치료방법 또한 확실하지 않은 위험한 병이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그가 괜찮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하지 못하는 의사가 밉다.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내가 밉다. 너는 왜 아픈 걸 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야. 혼자서 얼마나 참았던 건데. 도대체 왜 더 일찍 말해주지 않은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그를 지켜보는 것 말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잘못된다면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나는 일초도 버티지 못할 거야. 그니까 제발 살아서 돌아와. 의사는 한국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영국에서 이와 같은 질병을 완치한 사례가 있었다는 말을 이어서 해주었다. 영국으로 향하는 그를 보며 살면서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신을 간절히 찾았다.
 
신이 있을 리 없다는 걸 알지만, 만약 혹시라도 당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제발 당신에게 내 음성이 닿기를. 내게 남은 시간 따위는 어찌되도 좋으니 이걸 다 가져가서라도 그가 살 수 있게 해주시기를. 다시 볼 수 없어도 좋으니까 그가 조금도 오래 이 땅에서 살아가기를. 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만 가지고 있던 내가 나를 버였을 거란 던 신을 향해 무릎 꿇고 빌어본다.
 
네가 살 수 있다면 그게 어떤 얄팍한 희망이라도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칠 거야. 그러니 제발 너에게는 아무 일도 없길 바라.






 내가 영국에 온 후로 한국의 계절은 11번이나 바뀌었다. 대략 3년쯤 지나갔다는 소리다. 병원 안에서 3년이란,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짧은 시간이나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을 지독히 긴 시간. 나는 그런 3년간 병원에 있었다. 이 말은 즉 정일훈을 안 본 지 3년이나 흘렀다는 것이고 달리 말한다면 지금 당장 얼굴을 보고 싶다. 치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제 내게 남은 것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드디어 다시 너를 마주할 수 있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한국의 공기는 떠나기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텁텁한 도시 속의 공기. 그러나 이 텁텁한 공기가 얼마나 그리웠던가. 너는 믿길까? 내가 이 공기를 그리워했단 게. 아니, 생각해보니 내가 그리워했던 건 공기가 아니라 너였구나. 같은 땅을 밟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벅차오른다. 보고 싶었어, 정일훈.



 

익숙한 뒤통수. 익숙한 체형. 내가 눈을  제대로 뜨고 있는 게 맞는다면, 이게 정말 꿈이 아닌 현실이라면, 이창섭이 돌아와 우리 회사 앞에 서있다. 예전과 달라진 것 하나 없이 그대로인 모양새로. 지금까지 기대했다가 실망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오랜 직감이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라고 외쳤다. 그래. 이건 환상이 아니다.

'푸흡, 저게 뭐야. 그대로네.'

회사 정문 한가운데 뒤돌아서 있는 남자. 내가 나왔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아, 지금 나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더라. 뒤를 돌아본 그가 나를 향해 웃는다. 나는 웃고 있었나. 울고 있었나.
 
 
" 일훈아,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해?"
" 무슨 말?"
" 우린 우정일까, 아님 사랑일까."
" 뭐야,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 응,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날 너에게 말하지 못했던 걸 후회하던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데, 얼마나 어두웠는데, 얼마나 괴로웠는데.

"일훈아, 나는 사랑인 것 같아. 아니, 사랑이야. 내 사랑은 네가 전혀 짐작할 수도 없이 깊은 것 같아. 너가 알게 된다면 소름 끼치는 게 당연한,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마음이야. 억누르고, 억눌러도 이 추잡한 마음은 빠져나와서 나를 잠식해서 널 똑바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들어. 나의 태양인 일훈아, 네가 내 어둠에 물들지 않길 바래. 그러나 끝없는 나의 이기심은 끝까지 너를 붙잡았고 기어이 너를 찾아갔어.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

목이 메어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너는 대체 언제부터.. 지금 내 마음이 너와 다르다고 확신할 수 없다. 아니, 실은 같은 걸 알고 있어. 근데 나는, 네가 오래됐다는, 예전의 나는  

" 난 사실 그때 니가 왜 도망치듯 사라졌는지도 알고 있었어. 성재는 우리의 소중한 친구였잖아. 그런데 너에겐 그 이상이었을 거야. 그 아이는 늘 우리보다 한 발 앞서갔음에도 뒤돌아 보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니까. 누구라도 그 앨 좋아할 수밖에 없었잖아. 그래, 우리 셋은 언제나 함께였으니까 날 보면 생각날 수밖에 없었겠지. 근데, 그런데, 나는 니가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너를 놓을 수가 없어. 너를 보지 못하던 그 시간 동안 나는 살아있었다고 할 수 없었어. 나는 오직 너로 인해서만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일훈아, 울지 마."

" 너,. 대체 언제부터야? 왜..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 희귀병에 걸렸다는 말도 떠나기 직전에서야 말하더니! 내가.. 내가 대체 어떡해야..! 너는 정말 최악이야. 최악이라고."

"... 미안."

".. 하하, 넌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니가 사과를 왜 해. 왜! 나는. 난.. 성재가 그렇게 되고 나서 떠난 내가 니 생각을 안 했을 거 같아? 천만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어! 잊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너의 잔상이 날 덮쳐오는데, 니가 날 찾아오던 날 내 심정이 어땠을 거 같아. 내가 끊어버렸던 끈을 니가 필사적으로 다시이었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까? 너는 아직도 날 몰라."

나의 고백은 상대를 상처 입히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마지막 말은 하지 말걸.

"..."

" 울지 말라며, 왜 니가 울고 있어. 울지 마 창섭아, 그리고 사랑해."
 
내가 물들 거라 걱정하던 순백의 나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어. 나는 너랑 같은 어둠이야, 우리는 똑같아.

창섭아, 내가 너의 태양이라면, 너는 나의 우주야. 그러니까 네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지 말아 줘. 네 눈물이 내게 닿으면 나의 우주는 무너져내릴 테니까.
 
기나긴 악몽의 출구가 드디어 우리에게도 찾아왔다. 드디어, 이 어둡고 서늘했던 악몽에서 빠져나가 행복한 미래를 향해 나가자.
 
 
 
.EPILOGUE

그 해 겨울, 창섭은 새로운 신작을 발간한다. 그동안 그가 써왔던 것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내용을 담은 소설을.

{3년간의 긴 공백기. 새드엔딩의 대가, 작가 만가! 화려한 복귀작을 내놓다! 새롭게 출간된 작품은 다름 아닌 그의 첫 번째 해피엔딩?!}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을 꾸며낸 해피엔딩. 그러나 저들의 이야기는 비록 꾸며냈더라도 이건 결국 우리만의 엔딩일 거야.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테니까.

사랑해, 이 책을 나의 작은 태양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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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룬총 9월호 참여했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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