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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흉터

계간 섭른 가을호 참여작

『 글을 읽으시기에 앞서 이 글은 성재가 속한 A 국과 창섭이 속한 B 국이라는 가상의 두 나라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



 전쟁으로 인한 끊이지 않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토록 짙은 참혹함을 안겨주는 전쟁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모두가 그저 죽지 않기 위해 칼을 휘두른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전쟁의 흉터

 w.키아



 총을 들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새 군대에 와있었다. 나는 어느새 국군의 군복을 입고 있었으며 국군의 차를 타고 한찬 피와 살점, 비명소리가 끊기지 않고 날아다니는 중일 전쟁터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떨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양옆에 앉아 있는 이들 또한 그랬다. 다른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차 안에 있는 모두가 떨고 있었다. 우리는 전쟁터로 향하는 중이었다.




 20XX. XX. XX

 수많은 하루가 지나갔다. 처음 총을 잡았던 날, 처음 사람을 죽였던 날, 지나간 하루는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금방 죽을 줄 알았던 나는 몇 달이 지나도록 살아남았다.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잘도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직접 겪은 전쟁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수없이 반복되는 아군과 적군의 승리와 패배, 그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 나는, 아니 이 전장 안의 모두는 지쳐있었다.



 이름이 있는지도 의문인 흔하디흔한 산을 보았다. 언덕이라고 하기에는 높지만 산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그런 흔한 산들 중 하나. 그곳을 지나갈 우리였으나. 이 중 그 누구도 그 산의 명칭을 알지 못하였기에는 우리는 산에 다다를 때까지 그저 '그 산'이라고 불렀다.

 아마 저 이름도 알 수 없는 산이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소일지도 몰랐다. 우리의 계획은 빈틈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최후에 승리를 거 뭐지는 것은 내가 속한 군대일 것이다.  큰 이변이 일어나지만 않는다면. 제발 그래주기를 바라면서 군대는 점차 산과 가까워졌다.

  다 이겨가는 전쟁이라 생각해서 였을지도 모른다. 누구의 실수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그럴 필요 또한 없었다. 산의 중턱에 매복해 있던 B 국의 군인들이 우리를 공격했고 곧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일단 그때 우리의 위치는 적군에 비해 훨씬 불리한 자리였다. 사상자는 계속 나오는데 우리는 적의 위치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다. 마치 전쟁에 나왔던 첫날밤 꾸었던 악몽 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나는 도망쳤다.

 이 이야기를 누군가가 듣는다면 돌을 던지며 욕하겠지. 그럼에도 나는 달렸다. 그동안 나는 삶에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오판이었다. 나는 사실, 살아남고 싶다는 열망으로 똘똘 뭉친 존재였을 지도 모른다. 그나마 산 아래 있는 남아있는 군부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제법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살기 위해 나는  되지도 않는 변명을 가지고 뛰어갔다. 몇 시간 전에 올라왔던 길을 그대로 달려가는 순간들은 비록 잠시 동안이었으나, 내가 많은 생각에 잠기게끔 하였다.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았다.


 그 순간 시야에 날카로운 칼날이 갑작스레 존재를 드러냈다. 만일 내가 조금만 더 늦게 멈췄더라면 아마 내 생각은 저기에서 멈추었겠지. 발을 조금만 더 늦게 멈추었다면 방금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칼을 든 손을 따라 바라본 곳에 서 있는 남자는 혼자였으며 청색 군복, 그러니까 즉 적군의 군복을 입은 채였다.  그러나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미는 손과는 다르게 그의 눈을 메우고 있는 것은 살의가 아니었다. 바라보는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만 같은 짙은 공포. 그 남자의 눈은 공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뭐야."

 공포심? 아, 혹시 이 남자도 도망쳐 나온 걸까? 그렇다면 바보일게 분명했다. 이쪽으로 내려간다면 우리 부대가 있을 테니까. 자살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면 그는 지금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쪽으로 내려가면 A 군의 군대가 나올 겁니다."

 "... 알고 있었어."

 대답이 살짝 느렸던 거 같은데. 안쓰러울 정도로 흔들리는 동공은 무시해주기로 했다. 약간은 멍청한 것 같기도 한 대화가 반가웠다.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정일까.

 "그렇습니까. 그건 그렇고 이것 좀 그만 치워줬으면 좋겠는데요."

 말을 하는 동안 내 목을 향하고 있던 단검을 가리키며 묻자 그가 자신의 팔에 놀란 듯 칼을 내렸다. 문득 이 정도에 놀라는 저 사람이 피와 시체로 가득한 전장 안에서 사람을 죽여보기는 했을까 하는 생각이 조그맣게 피어올랐으나 이내 머리를 털어내었다.

 "오늘 처음 전쟁터에 나온 것 같은데 같은데 탈영병?"


 ".. 그러는 그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뭐, 저도 방금 그렇게 된 것 같긴 하네요."

 "방금..? 목적지가 있긴 해?"

 일단 생각해둔 게 하나 있기는 하지. 그러는 그쪽은 아예 아무것도 없는 것 같구먼.

"당연하지, 이쯤에서 통성명이나 할까? 난 육성재야. 별 성 자에 재료 재 자를 쓰지."

"무슨, 전쟁통에 웬 통성명이야, 명찰 달려있잖아? 지랄이다, 진짜. 난 이창섭."

 결국 할 거면서 욕하기는. 하긴, 처음 봤을 땐 목에 칼을 들이밀었는데 뭘 바라. 머리 한구석에서 내가 버리고 온 우리 부대와 눈앞의 군인이 속했을 군부대가 싸우고 있는 장면이 느리게 지나갔지만 애써 모른체하며 발을 움직였다. 시간이 지체되었기에 금방이라도 누군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본래 계획은 쭉 내려가 우리 부대에 가는 것이었지만 저 남자로 인해 바뀌었다. 더 이상 탈영은 상상 속의 일이 아니었다.

정말 실천할 줄은 몰랐으나 탈영이라는 단어는 지루하고 고된 전쟁통 속에서의 탈출구 같은 느낌이었기에 항상 가슴속에 숨어있었다. 비록 생각일 뿐이었지만 탈영에 대한 게획은 제법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법들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나는 그동안 생각해왔던 것들을 그대로 활용하기로 했다.


 나를 포함한 평범한 시민들은 명확한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 전쟁을 하기 위해 북쪽을 향해 나아갔었다. 그때 지나쳐왔던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에서 조금 더 가면 나오는 산을 지나가면서 보았던 작은 동굴도 있었다. 비록 머릿속이었지만, 우리의 임시 목적지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잘만 한다면 하루 종일 걸어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멀리서 봤었을 뿐이었기에 그 동굴에  실제로 들어가 본 적도 없었고 기억나는 것은 성인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만한 크기의 입구뿐이었지만 달리 마땅한 곳이 생각나지는 않았기에 그곳을 향해 달렸다.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을 이창섭이라고 소개한(이름 석 자만 말했지만) 저 적국의 군인은 별말 없이 바짝 붙어 따라왔다. 순수한 건지, 멍청한 건지. 뭘 믿고 이리 따라오는 걸까. 함정이면 어쩌려고. 그러나 나는 별말을 하지 않았고, 그 뒤로 우리는 한참을 달렸다.

 동굴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의 우리는 이미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지쳐있는 상태였기에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차가운 바닥에 널브러졌다. 내가 겨우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의 입구는 나보다 몸집이 작은 저 사람에게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만 꾸역꾸역 몸을 구겨 들어갔을 뿐. 입구는 작았지만 내부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넓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으나 입구에 비해 매우 넓었다는 말이다. 어느새 여름을 보내고 찾아온 가을의 날씨는 제법 쌀쌀해져 있었다. 작은 모닥불 하나 있으면 딱이었겠으나 위치가 발각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이 좁은 공간 안에서 불을 피우는 건 자살행위에 가까웠기에 우리는 그저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 밖에 하지 못했다.

 "하아-. 야, 육성재."

 추운 듯 손에 입김을 불던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왜."

 "안을까?"

 ".. 너랑 내가?"

 "아니, 이상한 표정 치워. 군대에 있던 놈이 이럴 때 체온 유지하는 법도 모르냐?"

 아,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확실히 따로 떨어져 각자 웅크리는 것보단 붙어있는 게 더 낫겠지.

 "아.. 그러네."

 "그렇지."

 성재의 따뜻한 품 안으로 창섭이 들어갔다. 따뜻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럴 리가 없었지만 좁고 어두운 동굴 안이었기 때문일까, 상식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에 맞닿은 적군의 군복은 한없이 따뜻하였다. 성재는  마치 작은 모닥불이라도 피운듯한 따뜻함을 지닌 채 자신에게 안겨 있는 창섭의 둥근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그래, 지금 네 체온이 유난히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바깥이 서늘해서 그런 거야, 날씨가 추워서.

 "내일은 내려가서 아래 있는 마을에 가볼래?"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이곳도 안전한 게 아니야."

 내 말에 그가 잠시 고개를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너는 얼굴에 무슨 생각을 하느니 쉽게 보이는 사람이었구나. 짧은 시간 동안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 이내 나를 보며 '그러네'라는 말과 함께 말갛게 웃는다. 아, 나는 아직 너를 충분히 알지 못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너는 우리가 떠나온 곳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부디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네가 피를 보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빈다. 또한, 발을 한번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던 시체들이 밟히는 그 끔찍한 감각들. 그런 건 내가 다 기억할게, 넌 잊어버려.

 작은 동굴 속에도 아침이 밝아왔다. 불편한 잠자리에 깊게 잠들지 못했기에 금방 눈을 뜬 성재와 창섭은 금방 마을로 내려갈 채비를 마쳤다.

 "성재야."

 "응."

 "나는 우리가 꼭 이곳에서 무사히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는 걸 성공했으면 좋겠어. 그다음엔 평화로운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내년의 오늘이 되는 날에는, 지금을 생각하며 울고 싶어."

 "응. 그러자."

 "하하, 너라면 그렇게 대답할 거 같았어. 자, 안 그래 보여도 나름 심사숙고해서 예쁜 걸로 고른 거야. 그때에 확인할 거야, 잘 간직해."

 "뭐?"

 이미 저 멀리로 뛰어간 이창섭을 바라보다가 그가 내 손에 쥐여준 낙엽을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일 년간 가지고 있으라는 건지. 그 덕에 바닥에 깔려있는 단풍잎을 인지하고 나니 아이러니하게도 탈영을 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전까지는 조금만 어긋나도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제 보니 아무렇지도 않으리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은 산을 조금만 넘어가도 사방은 늘어져있는 시체들로 인해 붉게 물들어있었지만, 그와 대조되는 이곳은 수많은 단풍들의 아름다운 붉은색에 물들어 있었다.

 심사숙고해서 골랐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손 위에 올려진 새빨간 단풍잎은 아름다웠다. 그래도 이걸 대체 어떻게 일 년 동안 가지고 있으라는 건지. 저 사람은 진짜 바보인 걸까. 성재의 툴툴거리는 머리와는 다르게 그의 손은 유리구슬이라도 만지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로 단풍잎을 군복 안의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바로 그다음 순간이었다.

 '탕!'

 위험하다고, 뛰지 말라고, 같이 가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 입을 떼는 순간 고막을 찢기라도 하려는 듯 날카로운 총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입 박으로 말을 꺼내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 커다란 총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배가 따뜻해졌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창섭은? 당장에 몸속에서 흘러나오는 중인 피보다 중요한 물음이었다. 같이 있던 것은 고작 하루 남짓한 시간이었는데 언제부터 나에게 이창섭은, 그런 존재가 되었던 걸까. 다행히도 좀 전에 뛰어가서인지 아직 다른 군인들은 이창섭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너도 나를 발견하지 마. 총소리가 안 들렸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기를 바랐다. 그대로 쭉 달려서 마을로 가. 그곳 사람인 척, 전쟁과는 상관없는 사람인 척하고 살아. 생각을 마치기가 무섭게 이창섭이 보였다. 겁먹은 얼굴에서  절망이 싹트는 것 같다. 그러지 마. 이쪽을 보지 마.

 세상이 돌았다. 총에 맞은 부위는 불에 타들어 가는 듯한데, 머리는 고통을 무시하고 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제발 이쪽으로 오지 마, 제발. 울컥, 입에서 빨간 액체가 쏟아져 내리고 나도 모르게 무릎이 꿇리며 몸이 무너져 내렸다. 안돼. 시선의 끝에는 울고 있는 이창섭이 있었다. 빨리 도망쳐. 힘겨이 입술을 떼었다. 혹여 소리치면 이곳으로 오고 있는 군인들이 눈치챌까 싶어 작은 소리조차도 내지 못하는 외침이었다.

 "도망가. 절대 뒤돌아 보지 말고 뛰어. 제발 부탁이니까 오지 마, 제발. 꼭 끝까지 살아남아. 살아서 늙어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만 살아. 이곳을 벗어나면. 날 잊어버려."

 간신히 버티고 있던 무릎에 힘이 빠지고 몸이 옆으로 넘어갔다. 괜찮아, 엉 똑똑하잖아. 다 전해졌을지는 모르겠어도 도망가라는 거 하나는 알아들었겠지. 넌 내 말을 무시하지 못할 거야. 그렇지?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천천히 눈을 감으려 했다. 그 순간 눈앞에 쌓여 있는 빨간 단풍잎이 들어왔다. 지금에야 느끼는데 참 예쁘다. 다 정말 예뻐. 정말 예쁜데, 그래도 네가 준 것만 한게 없네. 정말 열심히 골랐나 봐.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는 느낌에 구멍이 나있을 배를 보려 고개를 내렸다. 시선 아래에서는 붉은 낙엽 위에 쓰러져 있는 내 몸뚱어리가 보였다. 그때에서야, 가까워지는 군인들의 소리가 들렸다. 뭐가 이렇게 빨라, 기껏해야 병사 하나 도망친 걸 가지고.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은 바라보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와는 대조되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파랗고, 높았다. 제발 무사히 도망가기를, 끝이 보이지 않는 암 전이 시작되었다.

 창섭아. 꼭 무사히 도망쳐서 네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나를 지워줘.

 그리고 부디. 나 없이 행복해.


"싫어, 내가 널 어떻게 지워, 어떻게 잊어."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창섭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성재에게 닿지 않았다. 창섭은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  처음 성재를 만났을 때처럼, 북한군을 피해서, 남한군을 피해서, 전쟁을 피해서, 도망치는 중이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의욕이 생길 리 없었다. 삶에 대한 미련 따위는 진작에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는 건, 다 너 때문이다. 나쁜 자식. 결국엔 먼저 가버릴 거면서 그런 말은 왜 하는데. 내년에도 나랑 있기로 했잖아. 네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행복해. 말이 되는 부탁을 해.

눈물은 마르지 않았고, 원래 계획이던 마을을 지나친 것도 한참 전의 일이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창섭은 달렸다. 멈춰서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도 없었다. 그저 도망쳤다. 전쟁으로부터, 육성재로부터.


 20XX. XX. XX.

 나는 끝끝내 죽지 않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이 막을 내린 뒤에도 사지가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그 아픈 목숨의 주인들 가운데에는 내가 잘 아는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남았다. 오늘은 그를 마지막으로 본지 정확히 1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믿기지가 않는 시간의 단위가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나의 시간은 여전히 그때 그곳에 멈춰 조금도 흐르지 않았는데, 다른 이들의 시간은 무섭도록 빠르게 흘러간다. 처음 2년은 병원에, 다음 10년은 감옥에 있었다. 전쟁 중에 가져온 나의 하루 남짓한 시간의 대가였다. 오늘부로 남은 시간은 바깥에서 보낼 것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나가면 다시 너를 만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없는 시간 동안 급격히 바뀐 세상을 마주하기가 두려워. 지금은 그냥 오로지 네가 보고 싶어.

 한 남자 복잡한 심정을 가진 채 감옥 밖으로 나간다. 몇몇의 사람들이 그를 축하해준다. 그와 적지 않은 기간을 함께 했으리라. 그래서 그들은 알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변하지 않은 훤칠한 외모를 가진 그의 배 한편에 남아있는, 총알이 남기고 간 전쟁의 흉터를.


 계간 섭른 가을호 참여작 입니다. 올려야지 올려야지 생각만 하고 미루다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 재밌게 읽어주세요~~

합작계 링크 >> https://season-right.postyp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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